2023-05-21
B는 사실 집을 반쯤 포기하고 있더랬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미안했다. 집을 어지르는 주범이 나기 때문이다. 무언가 환기를 하고 싶어 시작한 대청소였지만 엄청나게 깨끗이 하겠다고 다짐했다. 왜냐면 B는 벌인 일을 완벽하게 끝내는 걸 좋아하니까.
청소 시작.
청소의 시작은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었다. 나는 B에게 여기 나와 있는 음식물이 다 안 들어간다고 호언장담하며 그걸 다 넣으면 앞으로 B처럼 버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정말 다 담기고 말아서 조금 무안했다. B는 음식 쓰레기를 버리러 갔고 나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얼마 후 부엌은 수영장이 되었다. 물로 청소를 하다 물이 잘못 들어가 양념통과 쌀을 시원하게 해준 것이다. 나는 B의 눈치를 보았는데 B는 별말없이 쌀을 옮겨담아 주었다. 그런 모습이 고마웠다.
부엌을 완벽히 청소하고 보니 별로 달라진 게 없어 조금 실망했다. 그래도 디테일이 다르긴 했다. B는 딱 7분만 쉬고 이어서 하자고 했다. 나는 커피를 따서 절반을 한 번에 마셨다. B는 쉬는 시간인데도 자꾸 일을 하려했다. 아무래도 빨리 끝내고 싶은가보다. 슬슬 오후의 햇살이 저물고 있었다.
여름이 온 지금에야 크리스마스 용품을 모두 넣었다. 그 자리에 우리의 사진을 두었다. B는 만족스러워 했다. 우리 끈을 둘러서 여기에도 사진을 걸자. 여행간 걸 하나씩 뽑아서 거는 건 어때? 좋아. 집안에 우리의 공간이 하나 늘 예정이다.
글루타치온 있다. 그거 하나씩 붙이자 활력이 필요하니까. 커피를 마신 후 입천장에 붙인 글루타치온은 정말이지 파마약 냄새가 났다. 나는 연신 찌뿌렸고 B는 뱉으라고 했지만 청소하다 끝까지 먹고 말았다.
가구 위 물건들을 치우고 B가 실패한 옷걸이대를 박았다. 깔끔하게 되지 않아 B에게 말했는데 그 정도면 됐지 그랬다. 꼭 나 같았다. 내가 옷걸이대를 혼내주는 동안 B는 거실 바닥을 닦았는데 B의 허리가 혼나고 말았다. 그런데도 B는 청소를 완벽히 끝내려 신발장도 청소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B의 허리가 걱정됐지만 신발장까지 깨끗하면 B가 더 좋아해할 걸 알기에 그러자고 했다.
잠시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 하늘이 어둡고 공기가 시원했다. B도 시원하다고 했다. 예전에 우리는 부부 같다고 그랬는데 오늘은 그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부부 그 자체였다.
청소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우리는 쇼파 위 물건과 신발장을 청소했다. 집은 올해 찍은 500원 동전처럼 반짝거렸다. B가 정말 좋아했다. 나는 B에게 먼저 씻으라고 한 후 오늘까지 내야하는 에세이를 썼다. 검토만 하고 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손을 오래 보게 돼서 B가 많이 기다렸다. B가 내게 다가와 밥 먹자, 배고파 이런 얘기를 했는데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성의껏 대답하질 못했다. B는 그런 나를 알았는지 먼저 시키겠다고 했고 나는 정말 에세이를 끝내버리려 머리를 팽팽 돌렸다. 피자보감님이 도착했다. 나는 아직 끝내지 못했다. B는 나를 기다려주었고 드디어 에세이를 제출한 후 B와 저녁 식사를 했다.
어제부터 보기 시작한 것은 슈퍼스타K였다. 미디어 금지라고 아침에 괜한 떼를 쓰던 나는 슈퍼스타K를 정말 재미있게 봤다. B는 피자보감님의 놀라움에 연신 감탄했다. 기분 좋은 저녁식사였다. B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으며 문득 오늘이 굉장히 만족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아무래도 몇 달 동안 바쁘게 살던 열기가 아직 다 꺼지지 않아 청소를 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니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꾸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이런 이유였나보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여유로운 하루에 차차 적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B는 아침 일찍 나가야 해 누웠고 나는 B의 옆에 누워 우리 노래를 틀었다. B가 깨끗한 집을 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B의 얼굴을 만지고 뽀뽀를 했다. 했다는 것보단 하게 됐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신나 있는 B를 보니 좋아사 자꾸 얼굴에 입을 맞추게 됐다. B는 장난을 쳤고 나는 B가 좋았다. B는 코가 막힌다고 했고 나는 B가 좋았다. B는 가만히 있질 않는데도 내 마음은 영향을 받질 않았다. B의 눈을 보면 웃고 있었고, B의 입을 보면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B가 자야할 걸 알지만 행복해하는 표정을 계속 보고 싶었다. B가 내 표정을 보더니 썸탈 때 표정 같다며 예전만큼 좋아해달라고 그랬다. 먹구름 같던 피로가 싹 걷힌 지금 나는 대답할 수 있었다. 그때보다 지금 더 좋아해. B가 애써 분위기를 잡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나와 감정이 같지 않아도, 장난을 쳐도, 재채기를 해도 처음 사랑한다고 말했던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시간이 멈춰있지 못하고 사람이 영원히 살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내일도 나는 집에서 B를 기다릴 것이다. 우리의 순간을 행복하게 지키고 있을 것이다. B가 내일도 오늘만큼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 이제 B의 옆으로 가서 깨우지 않고 몰래 잠들면 완벽한 하루다.